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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치기현 제3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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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도치기현의 동북부 지역인 오타와라시, 야이타시, 나스시오바라시, 나스카라스야마시, 나스군(나스마치, 나카가와마치)을 관할하는 일본의 중의원 선거구다.
현재 지역구 국회의원은 자유민주당 소속 야나 가즈오.
2. 상세[편집]
모두의 당의 당수였던 와타나베 요시미의 지역구였다. 부친인 와타나베 미치오도 의원을 지냈기에 기반이 탄탄했고, 자민당을 탈당해 모두의 당 후보로 출마했던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시에는 거대 정당들이 모두 후보를 내지 못하는 바람에 무려 95.3%(!)라는 어마어마한 득표율로 당선되었다.[1] 하지만 그 명성이 다했는지(...),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자민당의 야나 가즈오 의원에게 밀려 낙선했다.
이후 와타나베 요시미는 참의원 의원으로 전직했다.
3. 역대 국회의원[편집]
4. 역대 선거 결과[편집]
4.1.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편집]
4.2.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편집]
4.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편집]
4.4.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편집]
4.5.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편집]
모두의 당 대표인 와타나베 요시미가 자그마치 95%의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소선거구제 도입 이래 최고 득표 기록을 세웠다.
4.6.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편집]
4.7.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편집]
와타나베 요시미 vs 야나 가즈오 2번째 매치. 현역 의원인 와타나베 요시미는 직전 선거에서 95.3%라는 경이적인 득표율[4] 로 당선된 이후 모두의 당 당수로 승승장구하나 싶더니 계속되는 당내 불화로 인한 집단 탈당에 결국 다함께당이 해산되고 와타나베 본인은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되었다. 한편 자민당에서는 직전 선거에서 와타나베에 밀려 2위를 기록했던 야나 가즈오 의원이 재출마했다.
선거 결과 직전 선거에서 2위를 기록했던 자민당의 야나 가즈오가 이번에는 1위로 당선되었다. 와타나베는 95.3%로 당선되었던 그 영향력이 이제 다 증발했는지(...) 결국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자민당에게 지역구를 빼앗기게 되었다. 물론 무소속으로 출마했기 때문에 석패율제 구제도 안되어 그대로 낙선했다.
4.8.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편집]
자민당에서는 현역 야나 가즈오 의원이 재출마해 3선에 도전하고, 야권에선 47회 총선거에서 야나 가즈오에게 패배하고 그 대신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오사카 유신회의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와타나베 요시미가 희망의 당 소속으로 다시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려고 하여 와타나베 요시미 vs 야나 가즈오 3번째 매치가 성사되는 듯 했다. 허나 당수인 고이케 유리코가 와타나베 요시미의 중의원 출마를 반대하여 무산되었고, 대신 공인회계사로 일하던 와타나베 요시미의 여동생인 와타나베 미유키를 공천하기로 결정한다.
선거 결과 현역 의원인 야나 가즈오가 20%를 넘는 격차로 압승하면서 3선 고지에 올랐다. 와타나베 미유키는 친오빠의 지역구에 출마했음에도 친오빠가 직전 선거에서 얻은 표보다 더 적은 표를 얻어 낙선했다.
4.9.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편집]
현역 자민당 야나 가즈오 의원이 재출마한다.
지난 선거에서 후보를 내지 못했던 입헌민주당이 이번에는 도치기 3구에 입헌민주당 도치기현 연합 부대표인 이가 히로시(伊賀英)를 공천하기로 결정했다.# 공산당등 다른 야당이나 무소속 후보가 출마하지 않으면서, 이번 선거는 자민당 야나 가즈오와 사실상 야권 단일후보인 입헌민주당 이가 히로시의 1대1 대결로 치러진다. 소선거구제 출범 이후 처음으로 와타나베 가문의 일원이 출마하지 않는 선거이다.
투표 결과, 자민당 야나 가즈오 후보가 두배 이상의 격차로 압승했다. 이제 이 선거구는 와타나베 가문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나 야나 가즈오의 텃밭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4.10. 제5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편집]
자민당에서는 야나 가즈오 의원의 5선 도전이 예상된다.
입헌민주당에서는 지난 총선에 출마한 이가 히로시 후보가 계속 지부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재도전이 예상된다.
[1] 당시 상대 후보가 행복실현당(...) 후보 1명 밖에 없었다.[2] 추천[3] 추천[4] 사실 이 기록은 당시 상대 후보가 행복실현당 후보 1명 밖에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5] 추천[6] 추천